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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202106_전쟁론

8. 전쟁 계획 - 전쟁의 내적 연관성

전쟁의 절대적 양상 또는 절대적 모습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현실적 전쟁의 양상을 주목한다면

전쟁의 성공과 관련해 두 가지 상이한 관념을 떠올릴 수 있다.

 

전쟁의 절대적 양상에서는 모든 것이 필연적 원인에 의해 발생하고 신속하게 상호작용한다.

말하자면 실체가 없는 중립적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전쟁은 다양한 상호작용을 내포하고 있으며,

엄밀히 말해서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전투들이 상호 연관을 맺고 있고,

모든 승리에는 그것을 넘어설 경우 실패와 패배의 영역이 시작되는 한계정점이 존재한다.

 

따라서 이러한 모든 상황의 특성을 고려하면 전쟁의 절대적 양상에는 오직 하나의 승리,

즉 최종 승리만이 존재할 뿐이다.

최종 승리가 산출되기 전까지는 아무 것도 결정되지 않았고 아무도 승리하지 않았으며 아무도 패배하지 않았다.

여기서 우리는 결과가 최후를 장식한다는 격언을 끊음없이 되새겨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절대적 전쟁의 관념 하에서 전쟁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전체이며

그 구성부분들(개별 승리들)은 이 전체와 연관될 때만 가치를 지닌다.

 

1812년 보나파르트가 모스크바와 러시아 영토의 절반을 정복한 것이

그가 의도했던 평화로 이어졌더라면 가치를 지녔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정복은 그가 수립한 전역 계획의 일부분에 불과했고,

그 계획에는 러시아군의 파괴라는 목표가 결여되어 있었다.

만일 러시아군의 파괴가 부가적으로 성취되었더라면 일정 형태의 평화가 쟁취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보나파르트는 러시아군의 파괴라는 목표를 더 이상 쟁취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그 목표를 쟁취할 기회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첫 번째 성공도 쓸모없는 것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참사로 이어졌던 것이다.

 

전쟁에서 성과들 사이의 연관성에 관한 이러한 관념은 하나의 극단적 관졈으로 간주될 수 있으며

다른 하나의 극단적 관념과 대립한다.

이 다른 하나의 극단적인 관념에 의하면 전쟁은 몇 개의 게임으로 구성된 시합처럼

차후의 성과와는 무관한 개별 성과들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는 성과의 합계가 중요한 관심사일 뿐 모든 개별 성과는 게임에서 사용되는 침처럼 누계될 수 있다.

 

첫 번째 유형의 관념은 주제의 본질로부터 정당성을 확보하며, 두 번째 유형의 관념은 역사로부터 정당성을 확보한다.

하나의 작고 평범한 이점이 제약조건 없이 획득될 수 있었던 수없이 많은 사례가 있다.

전쟁의 폭력적 요소가 완화될수록 이러한 사례는 보다 빈번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전쟁에서 첫 번째 유형의 관념이 완전히 실현되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첫 번째 유형의 관념이 무시될 수 있을 정도로 두 번째 유형의 관념만 타당한 전쟁도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두가지 유형의 관념 중에서 첫 번째를 자명한 사실로 가정한다면 

모든 전쟁을 하나의 전체로서 파악해야 하며, 

야전사령관은 처음부터 모든 선이 집중되는 목표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필연성을 인식하게 된다.

 

두 번째 유형의 관념을 자명한 사실로 가정한다면

관념 자체의 목적을 위해 사소한 이점을 추구하는 것을 정당한 것으로 인식하고

그 이상의 것은 미래에 맡겨야 할 것이다.

 

이 두가지 유형의 관념 중에서 어느 하나도 성과가 있을 수 없으므로

전쟁이론은 둘 중 어느 하나의 관념을 배제할 수 없다.

전쟁이론은 두 가지 관념의 적용 시 양자 간에 차이를 둔다.

전자의 관념은 기본 관념이므로 모든 행동은 전자에 기초를 두어야 하며

후자의 관념은 상황에 의해 정당화되는 하나의 변형으로 적용되어야 한다.

 

1742년, 1744년, 1757년, 1758년 프리드리히 대왕은 슐레지엔과 작센 지방으로부터

오스트리아에 대한 새로운 공세를 시작했다.

그는 이 공세 작전을 통해 슐레지엔과 작센처럼 오스트리아를 영구적으로 정복할 수 없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세를 취했다.

왜냐하면 그의 목적은 오스트리아의 타도가 아니라 이보다 하위의 목적인 시간과 힘의 획득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존재 자체를 걸고 모험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 없이 그 하위의 목적을 추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1806년 프로이센과 1805년, 1809년 오스트리아가 앞선 전쟁의 경우보다 훨씬 절제된 목표,

즉 라인강 서쪽으로 프랑스 군을 축출하려는 목표를 계획했을 때,

양국은 초기의 성공 또는 실패가 낳은 일련의 사건들을 면밀히 검토하지 않았다면 

이 목표조차도 순리적으로 달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검토는 이 양국이 자신들의 승리를 안전하게 어느 정도까지 확대해 나갈 수 있고,

어떻게 어디에서 적의 승리를 중지시킬 수 있는가를 자체적으로 결정하는데 필수불가결하다.

 

역사를 주의 깊게 연구함으로서 이상의 두 가지 전쟁 사례의 차이점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다.

슐레지엔 전쟁이 일어났던 18세기에 전쟁은 오직 내각의 관심사였으며

국민은 맹인처럼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참전했다.

그러나 19세기 초에 들어서면서 양국의 국민들은 대립하는 양상을 띠게 되었다.

프리드리히 대왕에 대항해 싸운 적국의 야전사령관들은 주어진 임무 범위 내에서만 행동했던 인물들이었으므로

이들의 지배적 특징은 신중함이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와 프러시아에 대항하여 싸운 적국의 야전사령관들은 한 마디로 전쟁의 신 그 자체였다.

 

이러한 전쟁 양상의 변화는 전쟁에 대한 새로운 사고법을 요구한다.

1805년, 1806년, 1809년 당시 사람들은 완전한 파멸의 가능성을 인정했을 것이고, 

실제로 완전한 파멸이 목전에 펼쳐졌다.

이 완전한 파멸은 이전과는 다른 노력을 하도록 자극했고,

그 노력도 몇몇 성채와 중소 지방보다는 큰 목표를 지향했을 것이다.

 

그러나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재무장 시 마치 뇌우의 징후와 같은 정치적 분위기를 충분히 감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에 대한 태도를 변화시키지 않았다. 또한 이 양국은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전쟁 양상의 변화가 역사적으로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떻든 우리는 1805년, 1806년, 1809년과 그 이후의 전역을 본보기로 하여

파괴적인 에너지를 지닌 새로운 절대적 전쟁 개념을 보다 쉽게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전쟁 이론은 전쟁의 시초에 전쟁의 성격과 범위가 정치적 확률에 기초해 결정되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한다.

전쟁의 성격이 정치적 확률에 따라 절대적 전쟁에 보다 근접하고

양측 교전국가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많이 관련되고 휘말릴수록

개별 행동 사이의 상관관계가 더욱 명확하게 나타나므로,

전쟁의 최종 단계를 고려하지 않고 최초 단계를 시행하면 더욱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