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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202106_전쟁론

1. 전쟁의 본질 - 전쟁이란 무엇인가(1)

2. 정의

전쟁은 확대된 양자 결투에 불과하다.

양자는 공히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기 위해 물리적 폭력으로 상대방을 강요할 것이다.

이들의 당면 목적은 적을 타도하고 이를 통해서 어떤 추가적인 저항도 불가능하도록 만드는데 있다.

그러므로 전쟁은 우리의 의지를 구현하기 위해 적을 강요하는 폭력행동이다.

 

폭력은 폭력에 대처하기 위해 창안된 일련의 술(術)과 학(學)으로 무장된다.

폭력에는 감지할 수 없고 거의 무시해도 좋을 제한이 따르지만, 

국제법상의 관례라는 미명하에 존재하는 이 제한사항들이 그 힘을 근본적으로 약화시키지는 못한다.

폭력, 즉 물리적 폭력은 전쟁의 수단이고, 적에게 우리의 의지를 강요하는 것은 전쟁의 목적이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우리는 적을 무장해제의 상태로 만들어야 하며, 이것은 전쟁의 고유 목표이다.

이 목표는 전쟁의 목적을 대신하고 전쟁 자체에 속하지 않는 전쟁의 목적을 배제한다.

 

3. 폭력의 극단적 운용

인도주의자들은 지나치게 많은 사상자를 유발하지 않고 적을 교묘하게 무장해제 시키거나 타도할 수 있다고

쉽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전쟁술의 공유한 성향이기도 하다.

이러한 성향은 좋아 보이지만 우리는 이와 관련된 인식의 오류를 철저히 분쇄해야 한다.

왜냐하면 전쟁과 같은 위험한 상황에서는 이와 같이 자비로운 마음에서 생겨난 인식의 오류가 최악의 것이기 때문이다.

물리적 폭력의 극단적 운용에는 지성의 동시 작용이 결코 배제될 수 없는 까닭에

적과는 달리 피를 아끼지 않고 무자비하게 폭력을 운용하는 자가 분명히 우위를 차지할 것이다.

따라서 적에게 법칙을 강요하는 양자의 무자비한 행위는

양자의 내재된 상호 대항의 한계 외에 다른 한계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극단적으로 상승 작용을 일으키게 된다.

이와 같이 전쟁을 인식해야 한다.

야만적 요소에 대한 거부의지로 인해 전쟁의 본질을 무시하는 것은 헛되고 그릇된 노력이다.

 

문명국민 간의 전쟁은 야만국민 간의 전쟁에 비해 참혹하고 파괴적인 성격을 훨씬 약하게 띤다.

그 원인은 국가 내부와 국가 상호간의 사회적 상황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전쟁은 이러한 상황과 환경의 결과로서 나타나며 이러한 상황을 통해 제약, 제한, 완화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과 환경은 전쟁 자체에 종속된 것이 아니라 단지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완화의 원칙은 논리적 모순을 범하지 않고는 전쟁의 철학에 결코 도입될 수 없다.

 

인간들 간의 싸움은 본래 두 개의 상이한 동기, 즉 적대감정과 적대의도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는 그 가운데에서 후자를 정의하려는 대상으로 선정한다. 그것은 후자가 보편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물론 가장 야만적이고 본능에 가까운 증오감정을 적대의도를 배제한 채 생각할 수는 없다.

반면에 적대감정이 전혀 동반되지 않거나 최소한 지배적인 적대감정이 동반되지 않는 적대의도는 많이 있다.

야만국민들은 감성에 치우친 의도에 의해 지배되고 문명국민들은 이성에 치우친 의도에 의해 지배된다.

이러한 차이는 야만과 문명의 본질 자체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야만과 문명에 수반되는 상황과 제도 등에 기인하고 있다.

따라서 이 차이가 모든 개별적인 경우에 필연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나타나게 된다.

요컨대 최고 문명국민들 사이에도 상호 적대감정이 격렬하게 불타오를 수 있다.

 

여기서 문명국민들 간의 전쟁을 정부의 순수한 이성적 행동에 기인한 것으로 생각하고

나아가 전쟁을 어떤 정열과도 무관한 것으로 생각하려는 것은 명백한 오류이다.

만일 그렇자면 전쟁은 결국 전투력의 물리적 충격을 실제로 사용할 필요가 없는 대신 상호 전투력의 비교,

즉 일종의 전쟁의 대수학만을 필요로 할 것이다.

 

최근 전쟁양상이 교훈을 주었기 때문에 전쟁이론은 다음과 같은 방향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전쟁이 일종의 폭력행동이라면, 전쟁은 불가피하게 감성에 종속되어 있다.

만일 전쟁이 감성에서 연유되지 않은 것이라 할지라도,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감성은 분명 전쟁에 영향을 미친다.

여기서 정도의 차이는 문명의 수준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적대적 이해관계의 중요성과 지속기간에 비레한다.

 

문명국민들이라면 포로를 죽이지 않고 도시나 농촌을 파괴하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들의 지성이 전쟁수행에 좀 더 크게 작용하고 폭력을 운용하는 면에서 본능의 야만적인 표현방식보다

효과적인 수단을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화약의 발명과 무기의 지속적인 발전은 전쟁의 개념 속에 내포된 적을 격멸하려는 성향이 

문명의 진보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전혀 변화되거나 다른 방향으로 전환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도 남음이 있다.

 

우리는 다음의 명제를 반복하고자 한다.

전쟁은 일종의 폭력행동이며 그 폭력의 운용에는 한계가 없다.

따라서 누구나 상대방에게 법칙을 강요하여 이론상 극단적으로 치닫는 상호작용이 생겨난다.

이것이 우리가 부딪치게 되는 첫번째 상호작용이요 첫번째 극단이다.

 

4. 목표는 적을 무장해제하는 것이다.

적을 무장해제하는 것이 전쟁의 목표라고 논급한 바 있다.

여기서 이 명제가 적어도 이론적 관념에서는 필수적임을 밝히고자 한다.

만일 적에게 우리의 의지를 강요하려면,

우리가 적으로부터 요구당하는 희생보다 불리한 사황으로 적을 몰아넣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의 불리함이 적어도 외견상 일과성을 띠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적은 기회를 기다리면서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계속되는 전쟁 행동이 가져올 상황의 변화는 적어도 관념상 최초보다 더욱 불리한 상황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상대 교전국이 빠질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은 완전한 무장해제이다.

따라서 전쟁행동을 통해 적을 강요하여 우리의 의지를 관철시키려면,

적을 실제로 무장해제 상태로 만들거나, 그렇게 될 개연성 대문에 위협을 받는 상황으로 몰아넣어야만 한다.

여기서 적의 무장해제 또는 타도는 항상 전쟁행동의 목표여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한다.

 

전쟁은 생명이 없는 집단에 대한 생명이 잇는 힘의 작용이 아니며, 완전한 무저항은 결코 전쟁일 수 없으므로

항상 생명이 있는 두 힘의 상호 충돌이다. 전쟁행동의 궁극적 목표에 관해 논급한 것은 양자에게 공히 적용된다.

여기서 다시 상호작용의 개념이 등장한다.

내가 적을 타도하지 못하는 한, 나는 적이 나를 타도할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해야 한다.

따라서 나는 더 이상 지배하는 입장에 설 수 없으며,

내가 적에게 법칙을 강요하는 것처럼 적이 나아게 법칙을 강요하게 된다.

이것이 두 번째 극단으로 치닫는 두 번째 상호작용이다.

 

5. 힘의 극단적 발휘

적을 타도하고자 한다면 적의 저항능력을 고려하여 우리의 노력을 판단해야 한다.

이 노력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요인, 즉 현존수단의 규모와 의지의 강도로 구성된 산물을 통해 표현될 수 있다.

 

현존수단의 규모는 측정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완전하지는 않지만 숫자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에 비해 의지의 강도는 측정이 어려우며, 단지 동기의 강도에 따라 평가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적의 저항능력은 정확하게 평가될 수 있다.

적의 노력과 우리의 노력을 비교측정하여 적보다 우월하도록 우리의 노력을 크게 만들거나,

아니면 적의 노력이 우리의 노력을 능가할 경우 우리의 노력을 최대한 크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적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할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상호 상승작용이 나타난다. 이 상승작용은 순수한 관념상으로 양자가 극단으로 치닫도록 강요하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부딪치게 되는 세 번째 상호작용과 세 번째 극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