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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anities/202106_아비투스

아비투스가 삶, 기회, 지위를 결정한다

아비투스는 인생설계, 명성, 사고방식 및 생활방식, 식습관, 말투, 만족감, 신뢰, 사회적지위, 성숙한 삶을 좌우하는 결정적 구실을 한다.

아비투스란 세상을 사는 방식과 태도를 말한다.

아비투스는 누구에게나 있다.

그러나 아비투스는 일부에게만 평평한 길을 만들어주고,

누군가에게는 날개가 되어주기는 커녕 날아오르는 것 자체를 방해한다.

하지만 이러한 아비투스는 바꿀 수 있다.

 

인간은 각자 다른 조건을 갖고 삶을 시작한다.

어디에서 태어났느냐에 따라 우리는 성공에 유리한 아비투스를 많이 혹은 적게 몸에 익힌다.

행동방식과 생활방식, 지위와 언어, 자원, 성공기회, 삶에 대한 기대에서 추진력을 얻느냐 제동이 걸리느냐는 아비투스에 달렸다.

 

우리가 내리는 모든 결정은 우리가 어떤 사회적 관계 안에서 성장했는지와 관련이 있다.

표면적으로만 개인이 결정한 것처럼 보일 뿐이다.

아비투스는 사회적 지위의 결과이자 표현이다. 아비투스는 우리의 사회적 서열을 저절로 드러낸다.

우리와 비슷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 우리의 아비투스와 가장 걸맞다.

그런 곳에서 우리는 자신의 본질에 맞게 산다고 느낀다. 사다리의 어느 단계에 있든 상관없이 모두가 비슷하다.

모두 자신의 가정에서 아비투스를 가져오지만, 모든 아비투스가 세상에서 똑같은 가치로 간주되지는 않는다.

비록 계층 간의 경계가 모호하고 많은 사람이 다양한 세계에서 내 집처럼 편히 지내더라도,

적은 돈으로 건강한 식탁을 차리는 것보다 고급 레스토랑을 익숙하게 이용하는 것이 더 깊은 인상을 준다.

이런 가치평가의 차이 뒤에는 냉정한 논리가 있다.

 

지위와 구별짓기 게임에서는 상류층 아비투스가 모든 것의 기준이다.

그런 아비투스가 더 많은 명성을 얻고 더 많은 가능성을 가진다.

상위 10%, 나아가 상위3%의 고급 아비투스를 가진 사람이 위로 도약한다.

이것을 못가진 사람은 위로 오르지 못한다.

맞다. 불공평하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이다.

 

최고는 돈으로만 결정되지 않는다. 

다른 자원들도 의미있는 삶, 영향력, 만족감 등에 돈만큼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부르디외는 탁월함의 전제조건을 자본이라고 보는데,

그가 말하는 자본에는 돈과 능력 이외에 많은 것이 포함된다.

출신 배경과 인맥도 자본이다. 교육, 관계맺는 방식, 미적감각, 달변과 적합한 목소리 톤, 당당한 자세도 자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낙관주의와 안정적인 정신도 자본이다.

그러므로 남들과 자신을 구별짓고 돋보이게 할 수단은 아주 많다.

여러 범주의 자본이 인간의 잠재력을 맘껏 발휘하게 한다.(혹은 방해한다.)

 

심리자본, 문화자본, 지식자본, 경제자본, 신체자본, 언어자본, 사회자본, 이 모든 자본이 아비투스에 영향을 미친다.

자본 유형을 다양하게 가질수록 더 높이 올라간다.

 

심리자본은 낙관주의, 열정, 상상력, 끈기 등이며,

잠재력을 온전히 실현하느냐 아니면 중간 수준에 머물게 하느냐는 심리적 안정감에 달려 있다.

 

문화자본은 선망과 존중을 받는 코드와 취향, 몸에 밴 고급문화와 탁월한 사교술이라는 고전적 문화자본과

주의깊고 한결같은 생활양식 혹은 용기 있는 기행과 개별성이 새로운 트랜드의 문화자본이다.

 

지식자본은 졸업장, 학위, 전문지식, 경력, 학술 및 기능자격증 등으로,

자신의 지식과 역량으로 어떤 일을 해내는 능력이다.

 

경제자본은 소득, 현금자산, 부동산, 주식, 연금, 보험, 예상되는 상속재산 등 모든 물질적 재산이다.

 

신체자본은 스스로 얼마나 매력적이고 건강하고 활기차다고 느끼는 지에 대한 판단이며,

사람들은 외형에서 사회적 지위, 내적 가치를 유추한다.

 

언아자본은 유창한 언변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다양한 관점에서 구체적, 객관적으로 주제를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이며,

어디에서 무슨 주제를 어떤 방식으로 말해야 할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사회자본은 누구를 아는가, 개인이나 집단과 얼마나 잘 지내는가 이며,

든든한 가족, 훌륭한 롤모델, 도움을 줄 수 있는 인맥, 진정성 있는 멘토, 결정권자와의 친분,

서로를 격려하는 동료, 영향력, 권력, 가시성 등이다.

 

일곱가가지 자본 유형은 투자 포트폴리오와 같다. 저마다 자본유형의 구성과 비율이 다르다.

그러므로 비슷하게 좋은 교육을 받았다고 해서 반드시 비슷한 아비투스를 갖는 건 아니다.

부유한 가정 출신이더라도 자기 힘만으로 경제, 정치, 문화계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

그러나 확실한 이점이 있는 건 사실이다.

엘리트 채용에서는 유사성 원리가 지배한다. 결정권자가 되려면 결정권자와 닮는 것이 좋다.

물론 전문성도 중요하다. 그렇더라도 능력은 절반의 무기에 불과하다.

어려서부터 고급 아비투스가 몸에 밴 사람은 평균적으로 두 배 더 빨리, 더 쉽게 최고가 된다.

 

상류층 자녀들은 책임감과 자신감을 동시에 훈련하고, 어려서부터 구별짓기와 탁월함을 몸에 익힌다.

그러는 동안 중산층에서는 야심, 자제력, 충동억제 같은 다른 자질이 훈련된다.

하위 중산층 가정은 근면성, 현실성, 준법성을 중심 태도로 가르치고, 성공지향과 물질적 가치에 초점을 둔다.

정중한 태도와 근면성은 격려되지만, 사회적 날카로움과 비주류적 관심은 마뜩잖은 눈총을 받는다.

즉, 중산층 전체의 전형적인 아비투스는 성과 및 지위 추구다.

 

상류층과 상위 중산층 그리고 중위 중산층 사이의 경계가 유동적이긴 하지만

상류층과 중산층 자녀들 사이에는 명확한 차이가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일치하는 건 거의 다 대학에 간다는 것이다.

 

반면 하류층 부모들 중에서는 1/3만이 자식을 대학에 보내고 싶어한다.

이 같은 태도를 정의하기 위해 부르디외는 아모르 파티를 주어진 상황과 계급에 순응하는 태도,

즉 운명 순응으로 해석했다.

부르디외의 운명 순응은 자신과 같은 계급의 다른 사람이 성취한 것을 기준으로 야망을 품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가난한 부모는 딸의 미래를 위해 최고 대학의 경영학 전공보다 근로자 직업교육을 더 유심히 살펴본다.

생존 기술과 관련한 아비투스는 상류층보다 불안정한 저임금 노동자 계층에서 더 강하게 형성된다.

 

인간은 스스로 현실적이라고 여기는 일에 노력을 쏟는다.

인생설계의 모범이 없으면 자기 자신이나 자녀를 위해 그런 길을 찾아내지 못한다.

당신은 볼 수 없는 것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필수적인 것만 본다 해도 실용주의, 응집력, 좌절을 견디는 힘,

자신과 타인에 대한 강인함 등의 역량이 생긴다.

 

부르디외는 아비투스를 세 계급으로 분류해 단순화했다.

단순화는 사회적 차이를 이해하는 데 유용하지만 실제 현실에선 훨씬 더 다층적이다.

일곱 가지 자본 유형의 혼합이 각각 아비투스에 각인되기 때문에 복합적인 아비투스가 형성된다.

개별 자본 유형이 평균 이상으로 많아지면 그 범주에서 자신감과 특권이 생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일곱 가지 범주 모두에서 탁월한 사람만이 부와 차별성 그리고 권력을 갖는다.

하류층, 중산층, 상류층, 최상층 사이에는 차이가 있고 그 차이는 작지 않다.

어떤 사람의 아비투스를 알면 그 사람의 어떤 행동이 자신의 발목을 잡을지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우리의 성향과 편애는 삶의 경험과 함께 변한다. 인간은 상황에 맞춰 태도를 바꾼다.

모든 계층과 분야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자신이 가진 것을 세상에 내놓는다. 이 과정에서 우리의 수준은 계속 올라간다.

아비투스는 새로운 경험을 통해 끊임없이 변한다.

 

아비투스는 바뀔 수 있다. 우리는 출신 배경에서 벗어날 수 있다.

아비투스가 어떻게 세계관, 취향, 야망을 결정하는지 알면 출신 배경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다.

출신 아비투스는 비록 우리의 일부이긴 하지만, 우리가 출신 배경을 뛰어넘어 성장하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

 

그러나 동시에 한계에 부딪히고, 새로운 환경에 진입하자마자 기존의 아비투스가 걸림돌이 되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 근본적으로 잘못된 기분이 들 때도 있다. 그것이 불안감을 만들고 자신감을 갉아먹는다.

새롭고 어색한 사회적 코드에 익숙해지려면 학습이 필요한데, 그런 걸 가르쳐주는 강의는 없다.

그러나 모든 새로운 환경에서 비롯된 불안감은 자신의 그림자를 뛰어넘어 높은 수준으로 도양하라는 격려이기도 하다.

 

이 때 일곱 가지 자본 유형을 알면 도움이 된다.

이는 물질적, 비물질적 자원으로서 체계적으로 증가하며 우리의 아비투스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한 가지, 유년기에 몸에 밴 아비투스는 아주 깊이 자리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새로운 경험을 통해 바뀌기도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만큼 빨리 바뀌진 않는다.

어쩌면 당신은 이미 한 단계 위로 도약하여 새로운 환경에 처했을 때 그것을 체험했을 것이다.

정신력이 약해서 그런 기분이 드는게 아니다. 새로운 환경에서는 아주 당연한 일이다.

 

삶이 어느 방향으로 가든 아비투스는 언제나 느릿느릿 뒤따라 오기 때문이다.

새로운 상황에 아비투스가 완전히 적응할 때까지는 이런 뒤처짐이 계속된다.

부르디외는 이런 뒤처짐을 히스테리시스(이력 현상)이라고 부른다.

책, 에티켓 세미나, 경영자 교육 등이 자기계발을 지원해주지만,

새로 익힌 행동방식이 어딘가 모르게 어색하고 방금 배운 티가 나는 것을 막아주진 못한다.

 

새로운 환경에서 어느 정도 활동을 해야 그곳의 게임 규칙을 내면화할 수 있고 진짜 소속감을 느낄 수 있다.

우리의 행동이 애쓰는 것처럼 보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느껴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그렇게 쌓인 아비투스는 빌려입은 가짜가 아니라 진짜 외투다.

그러므로 새로운 곳에 처음부터 완전히 소속되고 싶더라도 여유를 갖고 아비투스가 서서히 물들게 놔두기를 권한다.

관찰하라. 뒤로 물러나 상황을 탐색하라. 그리고 적합한 아비투스가 저절로 생길 것을 믿으라.

아비투스와 뒤처짐은 심지어 장점이기도 하다. 히스테리시스는 위와 아래 두 방향으로 효력을 낸다.

그러므로 위에서 다시 아래로 미끄러지더라도, 위에서 형성된 아비투스는 오랫동안 유지된다.

 

일반 대중과 최정상의 경계는 어디인가? 최정상에 속하려면 무엇을 성취해야 할까?

기준점을 높이 두면 최정상들은 아예 우리가 사는 세상 밖에 있게 된다.

기준점이 어디에 있든, 최정상의 범위가 얼마만큼이든 경계는 임의적이다.

그러나 최정상의 정의를 어렵게 하는 걸림돌이 하나 더 있다.

무엇을 최정상으로 느끼느냐는 완전히 주관적이다. 사회적 위치에 따라 다르고, 어디에 시선을 두느냐에 따라 다르다.

어떤 기대를 갖고 있는가? 최고의 성과를 어떻게 정의하는가? 다른 사람의 탁월함을 어떻게 느끼는가?

 

모든 것은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최정상은 통계적 순위와 한계치만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적 인식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최정상이란 사회적 지위든 인생성과든 만족감이든 당신이 최고라고 여기는 바로 그것이다.

 

계층 사다리의 중간에 있는 이들은 성과지향 아비투스가 강할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환경에서 튀어보이는 꿈들을 기꺼이 실현한다. 더 큰 계획 앞에서 움츠로들게 하는 장애물을 털어낸다.

자신이 원하는 집단의 진입로를 찾아낸다. 경쟁에서 자신을 돋보이게 한다.

이들은 새로운 아비투스를 구축해 돈이나 능력만으로 안 되는 더 많은 가능성을 발견한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비밀스러운 지식이 아니다. 아비투스를 풍성하게 하는 자본 유형은 명확하다.

상류층으로 태어나지 않아도 고급 아비투스를 성취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