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로마제국은 적극적으로 '보수주의적 전략'을 전쟁 정책의 기초로서 신중하게 고안했던 하나의 예이다.
이 사실은 동로마제국의 유례 없는 장기 존속을 설명하기에 족하다.
또 다른 예를 들면, 그것은 이성이기보다는 오히려 본능의 산물인데,
영국이 16세기에서 19세기까지 자국의 전쟁에서 실행했던 해양력을 기초로 한 전략이다.
그 가치는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다.
영국은 자국의 발전과 더불어 그 국력을 유지했던 반면에,
영국의 적대국들은 완전한 승리를 즉시 획득하여 만족하고자 하는 강력한 욕망 때문에
전쟁에서 스스로의 국력 소진에 의해 몰락했다.
교전국이 쌍방간 상호 소모나 황폐화를 불러들인 싸움 중 특히 30년 전쟁은 18세기의 정치가들로 하여금
전쟁 수행시 목적 달성을 위한 야심 또는 정열을 억제할 필요가 있음을 인식하도록 했다.
한편, 이러한 인식은 전후의 전망을 파괴할지도 모르는 과도함을 회피하게 하는 등
암암리에 전쟁 규모를 제한하도록 유도했다.
또한 이러한 인식은 승리가 의문시될 때 기꺼이 강화 협상을 준비하도록 만들었다.
교전국들의 야심 또는 정열은 과도해질 때가 많기 때문에
이들 국가가 강화를 맺을 때 국력이 강해지기보다는 오히려 약해지고,
쌍방 모두 국력이 소진되기 직전에 전쟁을 멈추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교전국 제한이라는 것에 내재된 단계적 학습이 진행되고 잇다가 프랑스혁명에 의해 중단되었다.
프랑스혁명 당시 최고 지위에 있던 사람들은 통치술이 미숙했다.
혁명 정부나 그 후계자 나폴레옹은 20년 간에 걸친 전쟁을 통해 영구적 평화를 갈망하고 추구했다.
그러나 이러한 추구는 결코 목적에는 이르지 못했고 국력의 피폐로 처져가서 결국은 붕괴하고 말았던 것이다.
나폴레옹 제국의 붕괴는 이전에 종종 가르치던 하나의 교훈을 부활시켰다.
그러나 그 교훈도 나폴레옹 신화의 뒤안길에서 희미해지고 말았다.
그 교훈은 제1차 세계대전 무렵까지 잊혀지고 말았다.
제1차 세계대전의 쓰라린 경험을 겪고 난 후,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정치가들도 전혀 현명하게 행동하지는 못했다.
전쟁은 이성에 역행하는 것이다.
즉 전쟁이라는 것은, 논의에 의해서 합의가 이루어지는 것이 실패했을 경우
무력으로 그 분뱅을 해결하려고 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전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전쟁 수해은 이성에 의해서 통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다음의 이유에 기인한다.
(1) 싸움은 물리적 행동이지만, 싸움의 향방은 심리적인 과정에 속한다.
전략이 우수하면 우수할수록 한 수 위로 나오기가 쉬워지고 치러야 할 대가는 더욱 적어진다.
(2) 그와 반대로 힘을 낭비하면 낭비할수록 전세 역전의 위험이 점점 증대한다.
그 경우, 설사 전쟁에 이긴다고 하더라도 전후 평화 상태를 이용할 수 있는 힘이 점점 감소한다.
(3) 적에 대해 취하는 방법이 가혹하면 가혹할수록 적의 감정은 더욱 더 악화되고,
당연한 결과로서 우리 쪽이 극복해야 할 저항을 더욱 단단하게 만든다.
이와 같이 교전하는 쌍방의 실력이 백중하면 백중할수록
적의 지도층을 따르는 군대나 국민을 단결시키는 위험성이 있는 극단적인 폭력은 피하는 것이 더 현명하다.
(4) 이러한 계산은 더욱 더 멀리 적용된다.
자기 뜻대로 강제로 강화를 체결하려고 하는 의도가 엿보이면 엿보일수록 진로상의 장애물은 점점 더 단단해진다.
(5) 더 나아가 군사적 목적에 이르렀을 때, 패자에 대한 요구가 크면 클수록 우리 쪽의 곤란은 더욱 증대하며,
또한 전쟁에 의해서 일단 해결한 사항을 궁극적으로 다시 뒤집기 위한 구실을 좀 더 많이 제공하게 된다.
폭력이라는 것은 가장 신중하고 이성적인 계산으로 통제되지 않는 한, 사악하고 나선형으로 발전하는 순환고리이다.
이처럼 전쟁은 이성을 부정하면서 시작되나, 싸움의 전 단계를 통해서 이성의 존재를 요구한다.
싸움의 본능이란 것은 전장에서의 성공을 얻기 위해서 필요하다.
그러나 전장에서도 냉정한 두뇌를 가진 전투원은 적을 보고 '격렬하게 분노하는' 자보다도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된다.
투쟁 본능은 항상 통제 상태에 있어야 한다.
투쟁 본능에 의해서 자기를 상실하는 정치가는 국가의 운명을 짊어지기에는 부적합하다.
전쟁 전보다 전쟁 후의 평화 상태가 좋아진다는 것이 참다운 의미에서 승리이다.
이런 의미로서의 승리의 달성은 속전속결이나 또는 장기전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자국의 자원에 대해 경제적으로 균형이 잡혔을 경우에만 가능하다.
목적은 수단에 따라 조절되지 않으면 안 된다.
현명한 정치가는 그와 같은 승리를 획득할 수 있는 충분한 전망이 서지 않을 때는
평화 교섭을 위한 기회를 놓치는 일이 없다.
교전국 쌍방이 간혹 서로의 힘을 시험해본 후 교착 상태를 거쳐 강화했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적어도 상호간의 국력 소진 후에 강화하는 것보다는 훨씬 좋다.
그리고 이런 경우 영속적 평화를 위한 더욱 훌륭한 기반을 제공한 적이 많았던 것이다.
승리를 획득하기 위해서 모든 국력을 걸고 전쟁의 위험을 치르는 것보다는,
평화를 보전하기 위해 전쟁도 불사하는 편이 더욱 현명하다.
이 결론은 관습에 역행하는 것이지만, 경험에 의해 확인된다.
전쟁으로 인해서 입은 인류의 모든 비극을 조정할 수 있는 평화의 전망이라는
훌륭한 목적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충분하게 있는 경우에 한해서, 전쟁에서의 인내가 정당하다고 인정된다.
사실 과거의 경험을 깊이 연구하면, 승리를 목적으로 하는 전쟁을 추구하기보다는
분쟁 해결의 토의를 하기 위한 투쟁에서 상대방을 달램으로써 국가 목적에 접근했던 경우가 많았다는 결론에 이른다.
또한 역사 속에는 교전국 쌍방의 정치가들이 국내 평화주의자들의 심리적 요소에 대해서 더 나은 이해를 표시했더라면
훨씬 더 유익한 평화를 얻었을 것임을 보여주는 많은 예가 있다.
교전국 상방의 정치가들이 취하는 태도는 전형적으로 국내 정치상의 싸움과 너무 닮은 데가 많다.
국내 정치 무대에서 각 당은 자기 당이 상대 당에 대해 양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꺼린다.
그러다 한쪽이 화해의 경향을 표시하는데, 그 때 말의 표현은 지나치게 딱딱한 것이 통례이다.
상대방은 이에 대해서 반응을 늦게 나타내는 것이 보통인데
이는 첫째, 자존심이나 완고함 때문이고,
둘째, 화해 제스처가 상식으로 되돌아가자는 신호일지도 모르는데도
그것을 상대방의 약점의 표시라고 해석하는 경향을 빠지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운명의 순간은 지나가버리고 싸움은 계속되어 양쪽 다 상처를 입는다.
양쪽이 같은 지붕 밑에 살지 않으면 안 되는데, 다툼을 계속하는 것은 어떤 목적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것은 국내 정치의 경우보다도 현대전에 더 적응된다.
왜냐하면 국가의 산업화는 국민의 운명을 불가분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승리의 신기로'를 쫓을 때 결코 전후의 전망을 잃지 않는 것이 정치가의 책임이다.
교전국 쌍방의 실력이 너무나 비슷하여 한쪽에 대해 다른 쪽이 조기에 승리를 획득할 기회가 없을 때는
전략의 심리학에서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는 정치가가 현명한 정치가이다.
만약 적이 견고한 위치에 있어서, 우리가 공격하는 데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면
적의 저항을 가장 빨리 늦추게 하는 방법으로서 적의 퇴로를 열어두는 것은 전략의 초보적인 원칙이다.
마찬가지로 상대편에게 내려갈 수 있도록 사다리를 제공하는 것은 특히 전쟁서의 정책 원칙이어야 한다.
문명국 간의 전쟁 역사에 기초를 둔 그와 같은 결론들을
로마 제국의 야만적인 공격자들이 행한 순전히 약탈적인 전쟁이나
마호메트의 광신적 제자들이 수행한 종교적이고 약탈 전쟁과 같은 경우에
내재된 조건에 적용해도 좋을지 어떨지의 질문이 제기될 수도 있다.
로마 제국이나 마호메트의 전쟁에서 모든 협상된 강화는 정상적인 수준 이하의 가치밖에 갖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국가들은 그들의 약속이 국익에 부합된다고 여겨질 때를 제외하고
다른 국가를 거의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이 매우 확실하다.
그러나 도덕적 의무감이 희박한 나라일수록 물질적인 힘을 크게 중시하는 경향을 갖는다.
마찬가지로 개인적인 관계에서도 약한 자를 괴롭히는 형이나 강도형 인간은
자기 힘으로 도전해오는 사람에 대해서는 공격하기를 주저한다는 것이 공통적인 경험이다.
그 주저하는 태도는 평화형의 사람이 자기보다 큰 공격자와 맞서는 것을 주저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심하다.
개인이나 국가가 공격적인 존재를 돈이나 물질을 주고 그들의 기도를 단념,
또는 현대어로 말하면 유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왜냐하면 뇌물을 주고 아부하면 그것이 자극이 되어 더 많이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격적인 사람이나 나라는 그것을 억제할 수 있다.
그들은 힘을 믿고 있기 때문에 무서운 저항력에 부딪히면 그것이 갖는 억제 효과에 대해서 민감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순수한 광신 즉 팽창주의가 섞여 있지 않은 광신에 대한 경우를 제외하고 적당한 억제를 형성하는 것이다.
호전적인 사람이나 나라와 참다운 강화를 맺는 것은 곤란하지만,
그러한 사람이나 나라를 휴전 상태에 들어가도록 유인하는 것은 더 쉬운 일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을 파괴하기보다는 훨씬 자기 쪽의 힘을 덜 소모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그들을 파괴하려고 할 경우, 그들은 모든 인간과 마찬가지로 절망적인 용기로 맞서려고 하기 때문이다.
문명국의 몰락은 적의 직접 공격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고,
전쟁으로 인한 국력 소진 결과가 내부 붕괴로 연결되기 때문이라는 점은 역사적 경험으로 수없이 증명된다.
그러나 지속적인 불안의 상태는 괴롭다.
그것은 견디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에 개인이나 국가를 종종 자살행위로 몰고가는 수가 있다.
그러나 지속적인 불안의 상태라 할지라도 승리의 신기루를 쫓아 국력을 탕진하는 것보다는 낫다.
더구나 실제 교전 상태의 중지, 즉 휴전은 국력의 회복이나 발전을 가능하게 하며
한편 경제의 필요성은 그 나라가 경계를 늦추지 않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평화를 애호하는 국가는 불필요한 위험을 불러들이기 쉽다.
왜냐하면 평화 애호 국가들은 일단 자극되면 호전국보다 더 극단으로 달리기 쉬운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득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전쟁을 하는 호전 국가는 상대가 쉽게 정복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되면,
어느 때나 기꺼이 전쟁을 중지한다.
비참한 최후까지 싸우려는 전투원은 이해 타산에 의해서가 아니라 감정에 쫓겨서 망설이나 싸우는 전투원인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전투원은 설사 직접적인 패배를 자초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목적을 해칠 경우가 너무나도 많은 것이다.
왜냐하면 야만적 정신은 오직 정전 기간 중에 완화될 수 있을 뿐이고,
불꽃에 기름을 끼얹듯이 전쟁은 야만적 정신을 더욱 부채질하기 때문이다.
'History > 202108_전략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게릴라 전쟁(2) (0) | 2021.08.18 |
---|---|
대전략(1) (0) | 2021.08.09 |
국가 목적과 군사 목표 (0) | 2021.08.09 |
전략 및 전술의 진수 (0) | 2021.08.09 |
전략이론 - 전략의 기초 (0) | 2021.06.18 |